경주 동서 삼층석탑
경주 동서 삼층석탑
0. 경주동서삼층석탑에 관한 자료.
남산 동쪽 기슭 양피제 서쪽의 폐사지(廢寺址)에 서있는 경주남산리삼층석탑은
양식을 달리하면서 동서에 대립하는 특수한 쌍탑이다.
사찰에서 쌍탑인 경우 두 탑은 모양과 크기가 같거나 비슷한 것이 보편적이다.
이는 감은사지, 장항리사지, 천군리사지, 원원사지, 숭복사지 등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라 통일기의 동서 쌍탑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으로 조성되지만
이 곳 남산리삼층석탑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다른 양식으로 된 쌍탑형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다른 형식의 석탑이 쌍탑으로 가람에 배치되는 것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사찰의 정확한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평왕 9년 가을 7월조2) 및『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 고적조에는
남산사(南山寺)라 전해지고,
『삼국유사』사금갑조(射琴匣條) 및 염불사조(?佛師條)에는
남산 동쪽의 양피사(讓避寺)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 절터의 동서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말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탑은 큼직한 방형 무사석(武砂石) 기단 위에 모전석탑계 삼층석탑으로
상륜부는 노반을 제외하고 모두 오래전에 결실된 상태이다.
둔중(鈍重)한 무사석 기단에 우직한 탑신은 전반적으로 석탑의 균형을 잘 이룬다.
통일신라시대 모전석탑계 삼층석탑으로,
옥개석의 낙수면도 옥개받침처럼 층단으로 이루어진 특징이 있다.
경주지역에서 이와 같은 모양의 모전석탑은
경주서악리삼층석탑(보물 제65호)과
남산용장계지곡제3사지(茸長溪池谷第3寺址)삼층석탑 등
3기 밖에 없는 흔하지 않은 모양의 석탑이다.
서탑은 2중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신라시대의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가지는데
하층기단부에는 십이지신상, 상층기단부에는 팔부신중상,
1층 옥신의 네 면에 사천왕상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 양식으로 여겨졌다.
남산리 삼층석탑의 서탑 상층기단부에는 팔부신중상이 새겨져 있다.
팔부신중상은 동서남북 사면에 각 2구씩 여덟 개의 도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양식인 이중기단에 삼층석탑으로 기단부와 탑신부의 부재는 비교적 온전하지만,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고 모두 오래 전에 결실된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적정한 비례로 균형 잡힌 신라 후기의 전형석탑이다.
하층기단 면석 탱주는 2주로 3구(區)로 구분하고 있으나,
상층기단 면석 탱주는 1주로 2구로 구분하고 각 면 2구씩 팔부신중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와 같이 상층기단 면석에 팔부신중을 돋을새김한 예는
서남산 창림사지삼층석탑(昌林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영천 신월동삼층석탑(보물 제465호),
숭복사지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94호, 경주시)등에서 볼 수 있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5단이다
서탑 기단부의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은 실존하지 않는 신들로
밀교(密敎)가 발달함에 따라 인도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을 흡수함으로써
석가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로 상징화한 것이다.
천(天), 용(?), 야차(夜叉), 건달파(乾婆), 아수라(阿修?),
가루라(迦??), 긴나라(緊那?), 마후라가(摩喉?伽)이다.
천은 금강저(?剛杵)를 든 모습이고, 용은 용머리나 뱀의 모습이며,
야차는 사자나 사슴, 말 등의 짐승 모습, 건달파는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는 모습,
아수라는 팔과 얼굴을 여러 가지 모습, 가루라는 새머리,
긴나라는 사람머리에 새의 몸을 하거나 말머리에 사람 몸을 한 모습,
마후라가는 뱀의 관(冠)을 쓴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변화가 많기 때문에 분명히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 무렵부터 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되기 시작하는데,
대개가 무복(武服) 차림이며,
석굴암의 팔부신중이 가장 유명하고, 남산 창림사터. 숭복사지 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동면(東面)은 야차(夜叉)와 용(龍)인데 야차(夜叉)는 성난 얼굴을 하고 있고
용 (龍)은 머리에 용(龍)을 두르고 왼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남면(南面)에는 아수라(阿修羅)와 건달파(乾闥婆)가 있는데
아수라(阿修羅)는 3면팔비(面八臂)의 특징이 있고 건달파(乾闥婆)는 사자탈을 머리에 쓰고 있다
서면(西面)에는 천(天)과 가루라(迦樓羅)가 있는데
천(天)은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고 가루라(迦樓羅)는 새의 부리를 가지고 있다
긴나라(緊那羅)와 마후라가(摩候羅伽)이다.
긴나라(緊那羅)는 머리 양쪽에 말과 소머리가 달려 있고
마후라가(摩候羅伽)는 머리위로 뱀이 둘려져 있다
동서 양탑 사이 가운데에 석등부재들이 위치해 있다.
1964년까지도 석등 옥개석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석등 옥개석은 상면에 상륜을 놓기 위한 원공(圓孔)이 관통되어 있었고
이 원공 주위로 단판(單瓣) 8엽(葉)의 복연(覆蓮)이 장식되어 있었다.
쌍탑가람(雙塔伽藍)일 경우 석등의 위치는 주로 2가지 방법으로 배치된다.
곧 감은사지나 원원사지처럼 양탑 사이에 배치되는 경우와,
불국사나 실상사처럼 탑 뒤쪽에 배치되는 경우가 있다.
남산리사지(南山理寺址)의 경우 현재의 위치로 보았을 때 양탑 사이에 배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등 하대석은
방형(方形)의 지대석 위에 단판 8엽의 복연(覆蓮)이 조각된 돌이 단일석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부터 총 높이는 36㎝,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89㎝이다.
또한 연판(蓮瓣) 상면에는 중앙에는 지름 24㎝의 간주공(竿柱孔)이 마련되어 있다.
연판은 1개의 내엽(內葉)이 따로 마련되었으며 연판의 끝부분은 직각에 가깝게 처리되었다.
남산리사지 출토 찬지비
남산리사지 출토 찬지비 이수
이 사지(寺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1개의 비편(碑片)과 이수(螭首)가 발견되었으며,
1963년에 1개의 비편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비편과 함께 출토된 이수는 현재 절반 가량 결실되었다.
경주 지역의 귀부(龜趺) 가운데 이수(螭首)가 남아 있는 것은
무열왕릉(武烈王陵) 귀부(龜趺)와 무장사지(鍪藏寺址) 귀부(龜趺)가 있는데,
이 이수의 형태는 당비(唐碑)를 모방한 무열왕릉 귀부의 이수와 같은 형태로 비교가 된다.
절반이 잘려 나간 이수(螭首)의 제액(題額)에는 ‘손지비(飧之碑)’란 명문(銘文)이
해서(楷書)로 선각(線刻)되어 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위 자료는 "비단들" 카페에서 복사해 온 것 입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