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
고운 최치원
0. 고운 최치원 소개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출신으로 견일(肩逸)의 아들이며 신라 유두품
출신이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
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 책임을 맡으며
<토황소격 討黃巢檄> 명문을 만들어 이름이 높게되고 879년 황제로 부터 비은어대(緋銀魚袋)와 를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85년 29세때 신라에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고 후에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이 신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그의 40세가 되어 정치를 버리고
해인사 등지에서 은거 생활을 하엿다.
그의 저서로는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등이다.
동백섬에는 최치원 발자취가 있다.
동백섬에는 2005년 APCE 정상회담이 열린 누리마루가 있다.
동백섬 들어가는 입구에는 여러모양의 조각 화분들이 있다.
산책로에 들어서면~~~
최치원 동상가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이 서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자가 있는 경주최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곳이다.
최치원선생에 관한 안내판이 있고~~~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최치원선생의 동상이 있다.
동상 앞 넓은 광장에는 아이들이 ~~~
소풍나와 놀고 있고~~~
최치원선생 동상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는~~~
그분에 관한 행적이 적혀 있고~~~
좌측에는 그분의 한시들이~~~
석판에 조각되어 붙어 있다.
최치원선생의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 남긴다.
0. 여기까지 입니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동백섬에 잠시 머물면서 해운대 절경에 반해 동백섬 어느 바위에
자기가 해운대 경치를 감상하던 곳에 "해운대" 라는 글씨를 바위에 음각하였다.
해운은 최치원선생의 자로 즉 최치원이 구경하는 곳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해운대라는
이름의 유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만약 또다른 자인 "고운" 이라는 글씨를 새겼으면
"고운대" 가 될뻔 했다. 음각은 아직도 동백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