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지용
시인 정지용
0. 정지용 소개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
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가끔 ‘지용’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을 뿐이며,
여타의 아호 (雅號)나 필명은 없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곧바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8·15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옮겨 문학 강의와 라틴어를 강의하는 한편, 천주교 재단
에서 창간한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확인된 바 아니나,
이화여대 교수직과 경향신문사 주간직은 물론, 기타의 공직에서 물러나 녹번리(현재 은평구
녹번동)의 초당에서 은거하다가 6·25 때 납북된 뒤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1993.4.24., 5.1., 5.7.)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해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정지용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로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
조차 금기되다가 1988년도 납·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한국민족문학 대백과사전에서 발취함)
정지용의 동상과 뒷쪽의 기념관 건물
정지용 생가터 표시석
정지용 생가터는 1974년 모두 허물져 없어졌고 그자리에 새로이 몇동의 초가집을 지었고~~~
생가 앞에는 정지용시인의 대표작 향수의 시비가 있으며~~~
그에 대한 연역과 소개글이 ~~~
짧막하게 소개되어 있다.
싸립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우물과 장독대가 보이며~~~
바로 앞에 보이는 제일 큰집은 ~~~
정지용시인이 태어난 집이라고 한다.
옛집을 똑같이 재현 한것인줄은 모르나 이정도 초가집이면는 그당시에는 중산층에 속했고~~~
사실 정지용시인은 서울로 유학가서 휘문고보를 나왔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모교 교사생활과 이화여대 교수생활을 하였다.
정지용시인 기념관을 들어가 보니 정지용 시인이 그곳에 앉아있어~~~
그옆에 앉아 그의 손을 살포시 잡고 기념촬영 한번 하였다.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정지용시인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주의와 심미주의에 심취되어 있었으며 ~~~
문단에서 김영랑, 박용철등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과 같이 많은 활동을 하였고~~~
박두진, 박목월, 조치훈 등 청록판 시인들을 문단에 등용 시키는~~~
산파적인 일을 하였다.
한국전쟁전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 난뒤 은둔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에게 잡혀 북으로 끌려 가던중~~~
1950년 9월 25일 미군의 동주천 폭격때 폭사 한것으로 문화평론가 박태상씨는 말한다.
사실 그의 문학은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빛을 못보다가 1988년 해금되어 ~~~
그의 작품세계가 널리 알게 되었으며 ~~~
가수 조동원과 서울대 교수 박인수씨가 뚜엣으로 부른 ~~~
그이 대표시 향수로 인하여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옆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현대식으로 잘 정리된 ~~~
실개천 울타리에는 그의 작품이 걸려있어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0.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