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야기/수도, 경기권

인왕산과 서대문 형무소 이야기

어우렁 2009. 10. 29. 13:26

 

서대문 인왕산 이야기(장노시방 열 셋번째 산 이야기)

 

인왕산 정상에 있는 표시석

높이 : 338m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
인왕산에 대한 소개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北岳)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지명이 환원되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통제되었다가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2007년 12월 23일 산행

0. 10시 40분 신길동 출발

0. 종로3가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독립문 역에 하차.

0. 독립문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올라가면 우측으로 현대산업개발의 아파트 신축현장으로

     올라가면 언덕에 절 입구(아래 사진)가 보임

 

 

절입구에 있는 문

 

                                                           인왕산 국사당 모습

인왕산 국사당 소개

인왕산 국사당은 무속신당(巫俗神堂)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無學大師), 그리고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고 있으며, 특히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국사당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 이 당은 남산 꼭대기 곧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태종 4년에는 호국의 신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이 당은 1925년에 남산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하며, 당의 전면 3칸에 왼쪽에 한 칸이 붙어 있었으나 뒤에 오른쪽 한 칸을 붙였다. 따라서 전면은 약 20여m이고 측면은 9m정도의 크기이다. 기둥 칸살은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로, 내부 넓이는 모두 11평이고 바닥은 마루이다. 또 마루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는데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전면과 좌우 일부에는 무신도(巫神圖)가 걸려 있고 무신도 앞에는 제상이 있으며 마루는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일반건물보다 단순한 구조이긴 하나 구조는 큰 편이며 집 전체적인 구성은 견실하고 간소하면서도 방주(方柱)의 실귀〔糸刻〕이나 문살문의 새김 등과 같은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의 세련미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또 대들보의 후림이나 서까래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英祖)·정조(正祖)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도 드린다. 참배객은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이 찾아온다. 이 당에서 주로 행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부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귀굿이다. 그러나 이 당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이 아니고 당주(堂主)가 관리하면서 무당의 요청이 오면 당을 빌려주기 때문에 1년 내내 굿을 하나 하루에 보통 3건, 많을 때는 4∼5건을 하는데 특히 3월과 10월이 가장 많고 음력 섣달은 굿이 거의 없는 편이다. 당주는 신령님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는데 무녀를 초치해서 굿을 한다.
이 당 주위에는 기자암(祈子岩)으로 이름난 선(禪)바위가 있고 암자가 여러채 있으며 또 일반주택과 격리되어 있어 굿장소로 적합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이 국사당은 쇠잔해 가는 서울 무속의 집결처로서 무속신앙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선바위 올라가는 계단과 선바위(아래)의 모습

 

선바위는 인왕산의 최고의 명물로 국사당과 함께 무속신앙의 중심역할을 하며 많은 무속인들과 일반인들이 끝임없이 기도와 제를 올리며 이 선바위와 국사당으로 인하여 인왕산에는 많은 절과 산기슭 구석구석에 무속인들이 굿을하고 기도를 하던 흔적들이 무수히 많으며 오늘도 제를 지내는 모습도 보았다.

 

                                         무속인들의 흔적과 제를 올리는 모습

 

 

 

인왕산의 장군(호위)바위

(바위의 모습이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는모습이라 그리 부르며 저 바위에서 청와대가 보임)

 

 

올라가면서 이정표에서 짤~~~깍~

 

일일이 바위를 손으로 조각하여 계단을 만들었다

 

인왕산 준정상에 있는 군부대모습

(청와대가 근거리라 군인(경찰)들이 곳곳에서 경비를서고 지키고 있다)

 

 

정상 못미쳐서 날씨가 좋지않아 희미하게 보이는 청와대 모습

 

 

인왕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표시석 그리고 미녀 한분이~~~ㅎ ㅎ

 

성벽을 따라 하산길에 들어섰고

 

자하문쪽으로 방향을 잡고

 

자하문길이 통행금지로 길이 막혀 인왕산길쪽으로 g~~o~~~go

 

 

청운공원에서 한장찍고 자하문 고개로 하산

 

                                           자하문 고개에 있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

최규식 경무관

종로 경찰서장에 재직중 1968년 1월 21일(김신조 일당)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 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도 전사 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 무공훈장을 내렸다.  그의 죽음으로 공산 유격대의 실체가 들어나고 그 이후 김신조는 생포되어 전향된후 목사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 했으며 이사건으로 인하여 남쪽의 보복성으로  실미도에 특수부대를 창설하여 평양에 파견 침투시켜 김일성을 살해하고자 고도의 훈련을 시키고 양성하던중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이들 특수부대원의 처리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영화 실미도 처럼 실미도를 탈출하여 청와대로 진행중 영등포 대방동길(옛 유한양행 앞길)에서 탈취한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박아 모두 자폭하고 생존자는 치료후 군사재판을 받고 총살을 받았다.

 

자하문의 모습

자하문 소개

 북문() 또는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0. 14시 00분 산행을 마치고 다시 택시를 타고 독립문 공원에 가보기로 하였다.(택시비 3000윈)

    서대문 형무소를 철거하면서 일부를 남기어 옛 독립운동가들의 일제시대에 구금되어 피박받은 모습   을 재현시켜 놓았다고 하여 한번 와보고 싶어는데 이번 인왕산을 산행하면서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 일부로 찾아보기로 하였다.

 

    독립문과 영은문 기둥 모습

독립문 소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다. 창건 당시의 면적 2,800㎡였으며, 총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이 소요되었다. 완공일은 1897년 11월 20일이다. 현재의 면적은 2,640㎡이다.

프랑스에투알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다. 공역()은 건축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노역()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공사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충당, 1897년에 준공하였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영은문 소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었다. 1407년(태종 7)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워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430년 모화관()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1536년(중종 31) 모화관() 남쪽의 영조문()을 김안로()의 주청으로 개축하고 ‘영조문()’이라는 액자를 걸었는데,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연총()이 ‘영은문()’이라 써서 걸도록 한 데서 그 이름이 생겼다.

청일전쟁 뒤 사대사상의 상징인 모화관을 바꾸어 독립관으로 부르고 영은문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는데 그 앞 영은문의 주초 2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추춧돌은 사각의 민흘림 장초석의 화강암으로 4변에 모서리를 깍아 8각형을 이루고 있다. 1934년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독립문 앞에 세워졌다가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서대문 형무소 올라가는길에 있는 독립관과 3.1운동 동상

 

 

독립관 소개

 

독립협회서재필(윤치호() 등은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모화관의 명칭을 고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독립관으로 명명하고, 그 건물을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모화관 옆에 세운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는데, 이것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 후에 사용하지 않다가 1897년 독립협회가 건물을 고쳐 집회장소로 사용하였다. 독립협회는 사대주의를 외형적으로 청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힘썼다.

 

 

서대문 형무소의 외곽 모습

서대문 형무소 내부 모습

 

 

지하감옥 속모습과 겉모습

 

본 지하감옥 용도

이곳은 일제가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들만을 수감하고 고문하기위해 1916년 신축한 옥사로 그뒤 1934년에 옥사를 고쳐 지우면서 지하감옥을 매립 하였으나 1992년 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발굴 복원 하였다. 특히 이곳은 1920년 10월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순국하신곳으로 일면 유관순 굴이라고도 한다.

 

죄수용 용수와 식기(위) 족쇄와 허리와 허리를 연결해서 묶는 사슬(아래)

 

 

벽관 감옥의모습

 

벽관 소개

한사람이 들어가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비좁아 2,3일 동안 갇혀 있으면 전신이 마비되는 고문이다.

 

사형집행 과정을 형상화 시킨 모습

 

일제의 고문모습(사진속의 빛은 카메라 후레쉬 섬광임)

 

 

 

서대문 형무소 감옥안 모습

 

감옥문의모습

(좌측의 작은문은 간수가 방의 내부를 보는곳이고 중간의 나무모양은 비상신호기로 안에서 급한일이 있으면 나무를 누르면 작은 나무가 넘어져 간수가 알리는 것이고 큰문 밑에 구멍은 식사 제공문이다)

 

애국선열 추모비

 

사형장 옆에 있는 통곡의 미류나무

(사형인들이 사형장에 들어가기전 이 미류나무를 붙들고 울어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형장 입구 모습

 

 

사형장 모습

 

 

시구문 모습

(사형장 바로 옆에 있으며 사형집행후 죽은자를 이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다하여 시구문이라 부른다)

 

관람후 소견

전국민 1%도 안되는 지도층이나 정치인이 안일에 빠지고 사리사욕만 탐하며 국가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현실만 안주 한다면 결국 그국민들은 도탄과 고난에 빠질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선조들이 몸으로 느낀 현실이다.

아직도 우리들의 주위에 정신 못차린 몰지각한 지도층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국민들이 항상 깨워 있어 다시는 아픈 과거를 되풀이 되지않도록 하여야 겠다.

 

감사 합나다.

 

0. 2009년 10월 29일 "카페 장노시방"에서 옮겨와 간단히 재편집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