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강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0. 해설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일대는 조선 효종 7년(1656)에 강화도와 강화해협의 수로 방비를 위해
구축한 요새인 초지진(草芝鎭)이 있던 곳이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강화전적지 보수정비사업 때 초지 돈대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초지진은 원래 안산(安山)의 초지량(草芝梁)에 있던 조선 수군의 만호영(萬戶營)을 현종 7년(1666)에 강화로 옮겨 강화수로 수비의 요새로 새롭게 구축한 것이다. 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
(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하였다. 또한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
(長子坪墩), 섬암돈(蟾巖墩)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 간의 협공 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하였다.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하였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군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의 포격과 미국 해병 450명의 상륙공격으로 초지진이 미군에 점령되면서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또다시 초지진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문호가 개방된 이후 방치되어 허물어지고 말았다.
현재 초지진의 진사와 주요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초지 돈대는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 m 되는 타원형의 돈대인데, 내부에는 3군데의 포좌(包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으며, 조선시대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1971년 12월 28일 사적 225호로 지정되었다. (위키백과 인용)
초지진에 관한 안내문
초지진의 구성도
초지진의 옛모습 사진
초지진 초지돈대 모습
포격과 파괴로 폐허가 된 초지돈대의 내부 모습
초지돈대에서 바라다본 덕진돈대의 원경
위 사진 안내문
입장료를 받지만 코로나 19로 인하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여기뿐만 아니라 강화지역 관광지는 모두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겉으로만 구경하게 되었다.
성벽의 모습
큰소나무의 위용
큰 소나무가 이곳에는 두 그루가 있다.
소나무 한그루는 괜찬은데~~~
다른 소나무는 포탄 맞은 자리가 있다.
성벽에도 흔적이 있다.
성벽에서 한강 하류로 들어가는 수로가 훤히 보인다.
물살이 심하여 무인 등대도 설치되어 있다.
초지진에서 초지대교가 보인다.
덕진진
0. 해설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은 인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 12 진보(鎭堡)의 하나이며 1971년 12월 28일 사적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며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 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이다.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 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 돈대를 거느리고 덕진 포대와 남장 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 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으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해 이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 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위키백과 인용)
덕진진도 마찬가지로 코로나로 출입을 금해 밖에서 성문만 촬영하고 광성보로 이동했다.
광성보
0. 해설
사적 제 227호이다.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여 흙과 돌을 쌓아 강화외성을 쌓았다. 광해군 때
이를 고쳐 쌓았고 효종 9년(1658)에 여기에 광성보를 만들었다. 숙종 때는 광성보 안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의 소속 돈대가 완성되었다. 신미양요(1871)때 광성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미해병 450명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극동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
순, 군관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 등은 1976년
복원되었다. 현재 광성보에는 어재연 등 장수들의 용맹을 기린 쌍충비각과 무명 병사들의 무훈을 기린
무명용사비가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11:00부터 봉행된다.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오기에 좋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과 돈대의 곡선 모양이 인상적이다.
광성보 성문 입구 모습
광성보 안내문
광성보 돈대의 모습
0.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