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 대홍수 기념비와 이건창 암행어사비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1925년 7월 초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덮친 홍수를 말한다. 한강과 낙동강 유역의
피해가 특히 심했으며 홍수가 일어난 1925년 을축년의 이름을 따서 을축년 대홍수라고 부른다.
평균 700~970mm의 강수량이 내려 1억 300만 원의 피해액을 냈는데 이는 당시 연간 강수량의
80%와 조선 총독부 예산의 58%에 해당되며 서울에서만 64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가옥 6,792
여채가 거센 물길에 휩쓸렸고 붕괴된 가옥이 17,045채 침수피해는 46,813채에 달하여 29,229의
이재민이 생겼다.
1차는 1925년 7월 7일 타이완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이 11~12일 중서부를 지나가며 발생되었고~~~
2차는 7월 14일 타이완 부근에 다시 태풍이 생성되어 중부 지방을 15~18일까지 4일 동안 650mm
이상의 높은 강우량을 보여 연이은 홍수로 인해 한강의 수위는 최대를 기록했고 제방이 무너지고
범람하여 용산 일대가 물에 잠겼고 숭례문 앞까지 물이 차올라 서울 시내의 교통과 통신 또한
마비되었으며 당시 익사자만 400여 명에 1만 2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3차로 양쯔강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일본과 대만의 국경을 지나 간도로 빠져나가면서 8월 초에
관서지방에 호우가 내렸고 이로 인해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하였다.
4차로 마리아나 제도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여 북상하였고
1925년 9월 6일에는 제주도와 목포, 대구로 거쳐서 동해로 빠져나갔는데 남부 지방의 호우로 ~~~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등이 범람하여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쳐 63명을 기록하였다.
이건창 암행어사비
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
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다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충청우도를 암행할 때 탐관오리를 신문하며 쓴 녹수작(錄囚作)이다
‘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이건창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이건창은 부정부패한 탐관오리를 탄핵하다가 세 차례나 유배됐으며 갑오경장이 발표되자
척양척왜를 주장하여 관직을 버리고 강화도로 낙향했다 낙향 4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곳의 불망비는 이건창이 암행어사 시절 송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백성들이 그의 덕을 찬양하고자 1883년 송파장 입구에 세웠는데 을축년 대홍수 때 사라진 것을
향토사학자가 찾아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와 이건창 암행어사비는 송파 여성 문화회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다.
그곳 옆에는 송파 초등학교가 있고~~~
초등학교 앞 가로수에는 털실로 짠 옷을 나무에 입혔으며~~~
인근에는 송파 유래비가 있는데~~~
글씨가 너무 작아 읽어 보기가 힘들다.
0.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