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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민영환 추모비와 순화궁터

어우렁 2011. 3. 21. 09:24

 

충정공 민영환 추모비와 순화궁터

 

 

0. 위치 

   지하철 1호선 3번 출구로 나오면 왼쪽으로 나있는 작은 먹자골묵으로 들어가 200m 정도

   올라가면 태화빌딩이 있고 그 앞에 순화궁터 표시석이 있고 3.1운동 시작점이 되었던 태화관

   표시석도 있으며 그 옆길 건너편에 충정공 민영환 추모비가 있다.

 

 

 충정공 민영환 추모비

0. 충정공 민영환 소개 

      1861년(철종 12)∼1905년(광무 9).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시

      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여흥(驪興), 병조판서 민겸호의 아들.
1878년 고종 15년 문과에 급제. 미국 공사로 있다가 1896년 고종 33년 2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례.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신문명에 밝았으며,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의 변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귀국 후 참정(參政)에 올랐고 훈장조례를 처음으로 공포하였으며 사신으로 해외에 여러차례 나가서 공을 세워 훈 1등에 이르렀다.

외부·학부·탁지부 대신을 역임하여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 분투하였으나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왕의 시종무관장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형세에 이르니, 우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살하였다.

뒤에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받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위 유품 혈죽(血竹)은 충정공이 자결을 한 자리에서 피어난 대나무의 잎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제가 베어내려 했으나 부인이 따로 보존하여 오다, 충정공의 종손인 민병기씨가 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유품들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 당시 자료 >>>>>>>




민영환이 자결하고 8개월이 지나자, 피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라 인심이 술렁이자 일제 날조.

민영환 어른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김은호 화백, 김우현 목사 등 청죽을 목격한 분들이 많았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이른바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신문 보도대로 민영환이 순국한 지 8개월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랐다.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
집주변에 대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나무는 찾지 못했다.

마루를 뜯어 내고 주위를 파내며 다른 대나무가 뿌리를 뻗어서 솟아난 것은 아닌가 확인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는

"일제는 혈죽의 조작 증거를 잡지 못하자 대나무를 뽑았는데 쑥 뽑혔다고 한다. 만약 뿌리를 통해 번식했다면 대나무가 뽑혀 나올 리 없다"고 말했다.

잊혀졌던 혈죽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것은 광복 이후,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씨에 의해서다.

박씨는 자줏빛 보자기로 대나무를 싸고
폭 8센티 길이 50 센티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 했다.

고이 간직해온 혈죽은 유족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 옮겨지게 됐다.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자료 제공자 : 김성호 sindo88@hanmail.net


을사년(1905년) 9월 함열 회선동에 계실 때 하루는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大人輔國正持身이요
대인보국정지신

磨洗塵天運氣新이라
마세진천운기신

遺恨警深終聖意요
유한경심종성의

一刀分在萬方心이라
일도분재만방심

대인이 나라 위해 일함에 몸가짐을 바로 하고
선천의 낡고 묵은 기운 씻어 내니 기운이 새롭구나.
남긴 한은 성상(聖上)의 뜻을 못 다함이라
한 칼로 몸을 가름에 천하사람의 마음이 있노라.

상제님께서 “이것은 민영환(閔泳煥)의 만장(挽章)이니라" 하시니라. (도전 5:68)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청죽을 내려 그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5:69)  


이천만 동포에게 드림(민영환 유서)

오호라,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무릇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謝)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하노라.

 

 

순화궁터

인사동 입구 태화빌딩 앞~~~

 

순화궁 터 기념석

0. 순화궁터 역사

   ◇3·1만세 현장이 된 이완용의 집 = 본래 이완용의 집은 지금의 서울 중구 중림동 일대인

       약현(藥峴)에 있었으나 1907년 고종 퇴위에 분노한 민중의 습격으로 불타버렸다.

   집을 잃은 이완용은 남산 일대를 전전하다 망국 직후인 1911년 초 재빨리 이문동

   (지금의 인사동)의 순화궁터를 차지했다.

   순화궁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처소다. 1907년 6월 경빈 김씨가 세상을 뜨자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에게 넘어갔고, 이완용이 이를 사들였다.

   1913년 이완용이 옥인동에 대저택을 지어 이사하고나서 순화궁터에 지은 건물은 태화관이라는

   여관으로 바뀌었다. 태화관은 다시 1년 만에 여관에서 요릿집으로 용도가 변경됐으며 1917년

   당시 유명 요정이었던 명월관의 지점이 됐다.

   왕실의 건물에서 일개 기생집으로 전락한 순화궁은 1919년 3월1일 다시 한번 역사의 현장이

   됐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것.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의 집이자 민족대표가 망국의 부활을 선언한 장소인 이곳에는 현재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아이러니하게 3·1운동 당시에도 태화관의 주인은 이완용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자신이 소유한

   건물이 3·1만세 사건의 주무대가 된 사실이 부담스러웠는지 1920년 이 건물을 기독교 남감리회 

   여선교부에 매각했다.

   남감리회는 1937년 기존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태화여자관을 신축했는데 이마저도 1980년 도심

   재개발계획에 따라 헐렸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12층짜리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순화궁터에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기념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