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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정의공주 묘

어우렁 2011. 6. 20. 09:28

 

 

연산군과 정의공주 묘

 

 

연산군 묘

 

 

 

0. 연산군, 정의공주묘 위치

    1,4호선 창동역 1번 출구에서 1161, 1144번 버스 이용 정의공주묘 하차.

    4호선 쌍문역 2번출구 130번 버스 이용 정의공주묘 하차.

    주소: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02- 3494 -0370

 

 

연산군묘의 재실 안내판과~~~  

 

재실 모습 

 

 

 0. 연산군묘 재실은 연산군묘에서 조금 떨어잔 위치에 있다.

 

연산군묘 안내판

 

관람 시간표

 

사적 362호로 지정된 연산군묘

 

연산군묘의 전체 모습

 

연산군괴 부인 신씨의 묘

 

중간에 있는 묘는 조선 3대왕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의 묘

 

 

맨 앞에 있는 연산군 사위와 딸의 묘

 

연산군 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있는 소나무의 모습

 

 

전체적인 연산군묘역의 모습

 

왕능에 물주는 사람

 

연산군 묘에서 바라다 본 정자.

아직 보수공사중 인가 보다.

0. 연산군묘의 소개   

   연산군묘(燕山君墓)는 조선 제10대 연산군(1495∼1506 재위)과 거창부인 신씨(居昌郡 夫人愼氏)( ? ∼ 1537)의 무덤이다. 중종 8년 1513년에 조성되어,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도봉구 방학동 산 77번지에 있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성종 7년(1476)에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두번씩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등 성품의 광폭함이 드러나자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1506년 왕직을 박탈당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 1506년에 죽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그 지위가 군(君)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묘(墓)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묘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장례하여 무덤, 곡장(曲墻), 묘비(墓碑) 1쌍, 혼유석(魂遊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 향로석(香爐石) 1좌, 재실(齋室)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사초지(莎草地), 문인석(文人石)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월인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0. 태종 후궁 의정궁주 묘

    세종 4년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태종의 승하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해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원래 이땅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으로 후사가 없는 의정궁주의 제사를 왕명으로

  맡게 되어 현 위치에 의정궁주 묘를 조성하였고 그후 그의 외손녀 연산군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지금의 위치로 연산군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정의공주 묘

 

 

0. 정의공주 묘역은 연산군묘에서 한 블럭 건너편에 있다.

    대부분 버스는 이곳 근처에 있는 정류장에서 정차 한다. 

 

 

 

정의공주 묘 입구

 

안내판

 

정의공주 묘역 전경

 

정의공주 신도비

0. 정의공주 소개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년~1477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차녀이며, 문종의 누이

   동생이자세조의 누나이다. 아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에게 출가하였다.

   1469년(예종 1)에 정의공주는 남편인 안맹담이 죽자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

   (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대한민국 보물 966호로 지정되었다.

    정의공주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은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

     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즉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