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렁 2011. 8. 12. 18:34

 

 

 

안중근 공원

 

 

0. 2011년 8월11일 방문. 

위치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 1189번지

          부천 소풍터미널 건너편, 부천 현대백화점 옆에 있음.

 

 안중근 공원 입구에 있는 조형물 모습.

 

그 옆에는 시설물 위치도와 함께~~~ 

 

시설물에 관한 이름도 적어 놓았다.

 

중앙도로를 따라가면~~~

 

끝에 안중근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우측 길가와~~~

 

좌측 길가에는 안중근의사의 어록이 줄지어 서있다.

 

 

이곳에 안중근의사의 어록비를 촬영하여 올려놓아 본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0. 第一江山( 제1강산)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14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제작시기 조선시대 말기

제1강산(第一江山)은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가볼 수 없는 조국강산에 대한 그리운 심정이 나타나 있다. 안중근이 금강산을 비롯한 조국강산을 천하제일의 강산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이 글씨는 평양 대동강 가의 연광정에 걸려있던 제일강산(第一江山) 편액을 기억하고 쓴 듯한 필치이다. 말미에는 '경술2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쓰여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0. 황금 백만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0. 스스로를 보배처럼 사랑하라.

 

 

0. 博學於文 約之以禮(박학어문 약지이례)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13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라)는 안중근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에 이토 히로부미을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옥중에서 많은 붓글씨를 남겼으며 이 글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은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3]의 여덟 글자이며 가로 약 33cm, 세로 약 138㎝ 크기의 족자로 되어 있다.

글 왼쪽에는 '경술삼월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 라고 쓰여 있어 1910년 3월에 여순감옥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0.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3호 (1993년 1월 1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471 안중근의사기념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안중근이 공판정을 왕래할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 간수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치바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뒤 자진하여 제대했는데, 그가 사망하자 안 의사의 유묵은 그의 부인과 조카딸 미후라에 의해 보관되었다가1980년 8월 23일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을 통해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내용은 '나라를 위해 몸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뜻이다.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쓴 것으로 낙관·장인은 앞의 것과 같고 다만 낙관 말미에 '삼가 올림'을 덧붙였을 뿐이다.

 

 

0.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0.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2호 (1993년 1월 1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471 안중근의사기념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안중근이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행서 글씨 두 폭이다. 그 가운데 한 폭은 오른쪽 위에 "증안강검찰관"이라 쓰여 있듯이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의 취조를 담당했던 여순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야스오카는 사망하기 직전 이 유묵을 큰딸 우에노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하여1976년 2월 11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선지에 모두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썼는데, 내용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이라 낙관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0. 見利思義見危授命(견리사의견위수명)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6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1번지 동아대학교 박물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2월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여기서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에 여순 감옥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의 철학과 심경을 피력하였던 간절한 마음이 읽혀지는 내용이다.

견리사의는 이익 보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을 얻는 과정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라는 뜻이다. 이익이 된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쫓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0. 人無遠慮 難成大業(인무원여 난성대업)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8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2월

인무원여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논어 위령공 편에서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필히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는 구절을 응용한 듯하다. 즉, 먼 장래를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이 없이 그저 눈앞의 것만을 생각하면 필히 아침저녁으로 급박한 걱정이 생길 것이며, 그러면 결코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또 좌씨전 양공 편에 '자는 멀리 생각하고 소인은 가까운 것을 좇는다'라는 구절도 있듯이 먼 장래를 생각하는 군자의 도리를 언급한 것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0. 눈보라가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0.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0. 안의사가 조국을 떠나게된 계기가 된 청인 난타 사건.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하였다.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하였다.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안중근의사의 동상이 이곳으로 오게된 이유를 적어 놓은 석조물과 동상.

 

 

 

 

 

 

그밖에 안중근공원의 여려 모습들.

 

조각품들도 있고~~~ 

 

잣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산책로도 있으며~~~

 

 

어린이 놀이터와~~~ 

 

소공연장도 있으며~~~ 

 

교통도 편리하게 소풍터미널 건너편에 있다. 

 

 

 

단지동맹과 관련된 최근 기사.

 0.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안중근의사단지동맹기념비 ‘시련의 역사’ 딛고 다시 섰다

러에 건립 후 10년간 훼손·방치 한국기업 농장부지에 다시 제막

주변 공원 조성·숭고한 뜻 기려

2011년 08월 07일 (일) 15:47:41 김준구 기자 kimjk@kihoilbo.co.kr
   
 
   
 
러시아와 북한 국경 부근에 방치됐던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가 한국 기업에 의해 새로 세워지고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됐다.

대한광복회는 유니베라 러시아 법인,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국가보훈처 등과 함께 지난 4일 낮 12시(한국시간 오전 10시) 크라스키노 유니베라 농장에서 ‘단지동맹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단지동맹은 안 의사가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맹세하며 손가락을 잘랐던 사건이다.
행사에는 박유철 광복회 회장과 송영길 인천시장,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 신낙균 민주당 의원, 이재웅 다음 사장, 변대규 휴맥스 사장 등 국내 정·재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비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350㎞ 정도 떨어진 러시아·북한 국경 인근 크라스키노 지역에 있는 한국 기업 유니베라의 현지 농장 앞에 들어섰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지난 2001년 10월 안중근 의사 등의 단지동맹을 기념해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처음으로 기념비를 세웠으나 현지인들에 의해 훼손되는 사례가 많았다.
한국 기업 유니베라가 2006년 관리가 쉬운 제1농장 앞 공터로 비석을 옮겼지만, 이 지역이 국경지대로 편입되면서 러시아 보안당국의 허가 없인 출입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광복회와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유니베라 측이 나서 국경지역을 벗어난 유니베라의 다른 농장 앞에 다시 기념비를 세우는 작업을 추진해 왔다.

새로 세워진 기념비는 높이 4m·폭 1m의 큰 비석과 높이와 폭이 각각 1m 정도인 작은 비석 등 2개의 검은색 비석으로 이뤄졌다. 두 비석 사이에는 기존의 기념비가 들어섰다.
이 자리에서 송영길 시장은 “단지동맹 기념비의 역사적인 기념물을 잘 관리하고 안 의사를 비롯한 12분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중근의사에 대한 기록

 

안중근의사의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안인수, 진해 현감 역임
아버지 : 안태훈(泰勳), 진사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부인  : 김아려(金亞麗)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 안정근,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남동생 : 안공근,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큰아들 :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병으로 사망.
작은아들 : 안준생(俊生),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둘째며느리 : 정옥녀
딸: 안현생(1902 - 1960), 1953년 4월 ~ 1956년 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조카 : 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의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조카 : 안춘생,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손녀 : 안현생의 딸 황은주, 황은실과 안준생의 딸 안연호(2011년 2월 사망), 안선호(2003년 사망)가 있다.
손자 : 유일한 손자로, 안웅호(雄浩)는 안준생의 아들이다.
4촌  : 안홍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증손자 : 토니안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순국.

 

유년기와 소년기 활동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여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데 참여하였다.

 

소년기 후반대와 청년기 활동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10],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도마, 다묵)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복권형식의 채표의 추첨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난리가 생긴 것이다.

채표의 추첨날에 벌어진 군중들의 항의소동을 겨우 진정시켰다. 이후 사업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그는 채표 사업을 곧 그만두었다.

 

계몽 운동과 의병운동 , 국채 보상 운동

1905년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온다.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간다.

 

의병활동

 의병 활동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 그뒤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8년에는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2차례 진입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1908년 6월 안중근은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출정하여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사용된 권총과 같은 모델. 벨기에 FN M1900 권총.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되었다.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하였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차이쟈거우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차이쟈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만주 철도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국왕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

                        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유언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저서 및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