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물따라 /강원, 영남

사고와 사월의 종택

어우렁 2012. 5. 25. 10:08

 

 

사고와 사월의 종택

 

 

 

주강정과 사고종택

0. 주강정과 사고종택 소개

    주강정은 조시광이 거처했던 정자이고 사고는 조정옥의 살림집이다.

   이들은 조광조의 후손으로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때 화를 피해 각지로 흩어지면서

   조광조의 삼종숙 조종이 영주로 내려왔고 그 손자 조원이 영양으로 이거 하면서 5백여년

   자리를 잡고 번성하였다.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정침의 좌측 뒤쪽에는 손자인 주강 조시광이 건립한 주강성이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강정의 전면에는 주사(廚舍)와 별묘(別廟)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과 마루방을 두고, 우측에 팔작지붕을 얹은 3칸

   규모의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좌측칸의 마루방과 우측칸의 대청은 좌우로 돌출되어 양 날개집

   의 형상을 일게 하였다. 안채는 3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에는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각각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주강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또한 대청의 전면에 사분합문을 설치

   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 처마이다

 

솟을대문은 최근에 다시 짓은것 같다.

 

솟을대문 옆에 서 있는 나무들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 주는듯 하다.

 

사랑채의 모습

 

아직까지 보수공사를 하고 남은 잔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 넓은 집을 종부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다.

 

그래도 비워 놓은것 보다는 훨씬 보기도 좋고 그런데로 관리가 되고 있는듯 하다.

 

 

 

 

 

 

 

 

 

 

 

사랑채 뒤로 돌아가~~~

 

쪽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마도 이곳이 주강정을 새로 건축하여 놓은것 같고~~~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본채의 뒷모습을 촬영하고~~~

 

쪽문과 본체를 찍어 본다.

 

새로지은 솟을대문 옆에는 무슨용도에 사용하였던 건물인줄 모르나 곧 쓰러질것 같다.

 

사고 종택을 떠나면 사진 한장 찍었다.

 

 

 

 

 

 월담헌과 사월종택

 

 

 0. 월담헌과 사월종택 소개

   사월은 임란과 호란때 큰공을 세워 자헌대부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던 조임을 말하며

   조임이 말념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고 머물러던 곳을 월담헌이라고 한다.

 건축양식은 월담헌이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누각을 주 건물로 하여 주택을 사각형으로 배치

 하는 매우 희귀한 예로, 개인 주택으로 정남향(正南向)인 집은 궁중 건물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방이 셋이고, 마루가 4칸으로 규모가 크고 종택

 은 주위에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정침의 좌측에는 3칸 규모의 초가 방앗간채를 두었고,

 담장 밖 우측 언덕 위에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원래 일자형

 (日字形)에 가까운 배치형태로 지어졌으나, 제청과 문간채는 철거되었다. 현재는 ㄷ자형의 안채

 우측에 ㄱ자형의 사라애가 연접된 형태로 축소되었다. 문간채는 이 집안이 자손이 귀한 탓에

 풍수상의 이유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을 통째로 온돌방으로 꾸민 후

 뒤쪽으로 다시 온돌방 1칸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4칸 마루방을 연접

 시켰다. 마루방 하부에는 민흘림의 하층주를 세워 마루방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으며, 정면과

 우측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둘렀다. 가구는 오량가의 홑처마집인데, 대청 주위의 문틀의

 모습은 모두 중간 설주를 세운 고식(古式)의 영쌍창으로 구성되었다. 이 종택은 400년 이상의

 고식을 간직하였고, 누마루의 각 문에는 중간 설주를 문짝 사이에 배치 하였다. 

 

월담헌의 모습

 

월담헌 옆에는 사당 건물이 있다.

 

월담헌은 특이한 건축양식으로 문화적 가치가 높다.

 

 

 

 

 

담장은 흙돌담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마루밑에 있는 아궁이 또한~~~

 

뚜껑을 현대식으로 고쳐지만 특색이 있으며~~~

 

누마루의 모습도 정겹고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지붕은 처마끝이 살짝 올라가는 팔작지붕 형식이고~~~

 

 

 

종부 혼자 살아가면서~~~

 

잘 관리가 되어 있는듯 하다.

 

 

 

 

 

 

 

 

 

 

 

집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종부가 기거하는 사랑채의 겉모습을 촬영하고는~~~

 

아직도 디딜방아가 있는 헛간을 카메라로 잡아보고~~~

 

그리고 외진곳에 있는 거시기와~~~

 

돌담을 둘러 보는데~~~

 

 

 

돌담 밑에 피워있는 활짝핀 꽃이 아름답다.

 

사월 종택을 나와~~~

 

기념촬영하고는~~~

 

가까이에 있는 숙운정을 보러 갔다.

 

문이 굳게 닫쳐 있어~~~

 

겉으로 사진한장 찍고는~~~

0. 숙운정 소개

   사월선생이 임진란이 끝난 후 숙운정을 세우고 광해군 때 이 이첨 일당의 탁란으로 실정하여

  세상을 등지고 대명절의로 널리 알려진 명사 두곡 홍 우정(杜谷 洪 宇定), 만산 라 만갑(萬山

  羅 萬甲), 창석 이 준(蒼石 李 埈), 석계 이 시명(石溪 李 時明) 선생들과 같이 풍류로서 시와

  술을 벗삼아 세월을 보내던 정자인데 원래 월담헌 동편 선유굴사이에 있었으나 많이 파손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지가 백년 가까이 된다.

                                         옆에 있는 비각이 있길래 보았더니~~~

 

사월선생의 신도비 이였다.

0.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