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대첩비
0. 황산 대첩비 소개
왜구의 침입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고려 말기에는 더욱 극심해졌다. 이때 왜구의 노략질이 격심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의 정치·정세가 극도로 혼란하여 변경지방민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이 지역은 해안뿐 아니라 내륙지방까지 왜구의 발길에 짓밟혔다.
왜구는 수도 개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화 교동과 예성강까지 나타났다. 이에 고려정부에서는 최영(崔瑩)·이성계·나세·최무선(崔茂宣)·박위(朴葳)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무찌르게 했다. 1375년(우왕 1) 대대적인 왜구의 침략에 맞서 최영은 홍산에서 적을 쳐부수고 대승을 거두었지만 침입은 계속되었다.
1380년 8월 왜구는 손시제(孫時制)를 우두머리로 하여 500여 척의 배를 타고 금강 어귀에 있는 진포(지금의 서천)에 상륙했다. 고려정부에서는 나세·심덕부·최무선을 지휘관으로 삼아 왜구를 치도록 했는데 최무선이 화약을 사용하여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들은 배를 잃어버려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더욱 잔인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다.
이에 고려정부는 이성계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아 쳐부수도록 했다. 왜구는 경상도 상주·선산·경산부(지금의 성주) 등을 차례로 노략질하고 지리산 근방의 사근내역(함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의 정산봉으로 나아가 이지란(李之蘭)과 더불어 악전고투한 결과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고려는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얻고 기타 무기도 많이 노획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때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577년(선조 10)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비의 높이는 4.25m이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괴하여 원상이 훼손되었으나, 남아 있던 귀부와 이수를 이용하여 1957년에 다시 세웠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으며, 남응운이 전액을 만들고, 박광옥이 세웠다. 이 비문에는 황산대첩에 관한 사실과 비문을 세우게 된 목적·사정을 싣고 있다.
황산 대첩비 유적지 전경
옆문으로 들어가 보니~~~
관광객 한분만 있고 막 나가려고 하여 급히 사진한징 부탁 하였다.
파비각을 살펴 보았는데 파괴된 비석이 들어있다.
파비각 안내문
대첩비각 모습
대첩 안내문
대첩비 모습
사적비각과 안내문
비각안에 있는 부서진 원래 비각의 모습
앞뜰에 세워진 현대판 황산대첩 기념비와 안내문
황산대첩 유적지 밖에 있는 시조 한수
0.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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