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파독 광부 기념관
태백 파독광부 기념관은 철암 탄광 역사촌 안에 있다.
파독 광부는 1960년대에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지향정책은 농촌 붕괴 현상을 초래했다.
그 결과 막대한 실업과 외화 부족현상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국 정부는
광부와 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의 해외송출을 추진했다.
반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었으며~~~
많은 취업의 기회가 보장된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그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63년 파독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여 명이 지원할 정도로~~~
당시 한국의 실업난은 심각한 상태였고 3년 계약의 파독광부들에게는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높은 수입이 보장되었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로 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광산 노동의 경험이 없는 초심자이라 크고 작은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렸다.
광부의 파견은 1963년 12월 16일 한국 정부의 임시고용계획에 관한 한국 노동청과 독일탄광협회
간의 협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협정에 따르면 한국 광부의 파견조치는 “한국 광부의 탄광지식을 향상해 한국 산업에 기여”
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의 광부인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동시에 미국이 독일에게 요청했던
한국 재건지원의 약속 이행이라는 ~~~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고자 했던 독일정부의 의도와 실업난과 외화획득을 위해 해외인력 수출을
원했던 한국 정부의 이해가 부합되어 이루어진 조치였다.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89-7 에는 남해 파독 전시관이 있으며~~~
지하 1,200m 갱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파독 광부와 ~~~
외롭고 고된 생활을 이겨 낸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간 있다.
독일 생활의 향내를 간직한 실제 유물과 영상은 독일 생활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글릭 아우프!" 살아서 돌아오라는 인사로 시작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꼭 방문해 보자.
이들은 이렇게 국가와 개인을 위하여 희생된 위대한 역사를 기록하신 분들이다.
아래 사진은 독일서 귀국할 때 입는 옷차림과 휴대품들이다.
0.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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