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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기념관

by 어우렁 2025. 2. 8.

 

주기철 목사 기념관

 

o. 주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841

기념관 앞에 주기철 목사님이 당시에 예배했던 바위돌을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진학하였다가  일 년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후 고향으로 내려왔다. 

1922년 3월 봄학기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1923년 봄부터 경남노회 소속 양산읍교회 조사(助事)로 부임하여 첫 목회에 발을 들여

놓았고 1925년 12월 22일 평양신학교 제19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

12월 30일에 열린 제20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부산 초량교회의 초청을 받아

1926년 1월 10일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훗날 신사 참배 거부로 순교한 조용학 영수, 신사 참배 거부로 5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1928년 1월 제24회 경남노회, 1930년 6월 제28회 경남노회에서 부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2년 1월 제3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에 피선되고 ~~~

1933년 1월 제31회 경남노회에서도 노회장에 재선되었다.

 명설교가로도 이름이 나 1933년 이후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비롯한 각지에서 설교하였다.

주기철은 1938년 봄 신사 참배 거부 문제로 평양경찰서에 1차 구속을 당하였고,

일제 경찰의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다시 검속되었고, 1939년 1월 29일 대구경찰서에서 석방되었다.

1939년 10월에 모인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 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나 장로는

주일 예배에서 설교나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의를 하게 했다.

주기철은 개의치 않고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계속했고,

같은 해 10월 중순경에 다시 구속되었다.

이후 신사 참배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산정현교회 문제가 일단락되자 1940년 4월 20일

평양경찰서에서 풀려났다.

1944년 4월 13일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병감으로 이감되었다가 ~~~ 

4월 21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후 그날 밤 9시경 4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념관 앞에는 주기철 목사님의 성지순례길이 소개되어 있고 ~~~

기념관이 잠겨있어 겉 모습만 둘러보고 떠나면서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했다.

0.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