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0. 주소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
전지(田地) 2,500 결(結)을 하사하였는데 ~~~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法孫)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고 ~~~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 · 원음루(圓音樓)가 불탔으며 ~~~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殿)이 ~~~
불타버리자 뇌음(雷音) 스님이 중건하였다.
현재 구광루에서는 여러 불교 관련 소품들을 팔고 있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坡)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惺坡)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 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
관찰사 김노경(金露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 · 연월(淵月)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
1871년(고종 8)에 법성료(法性寮)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 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
그때 해인사는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 결과 승려 100명을 ~~~
지정받았고 또, 1902년에 원흥사(元興寺)를 전국의 수사찰(首寺刹)로 정하고 ~~~
전국에 16개 중법산(中法山)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
1911년에 전국을 30 본산(本山)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현재는 말사 172개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리고 있는 법보종찰이며 ~~~
선원(禪院) · 강원(講院) · 율원(律院) 등을 갖춘 총림(叢林)으로서 ~~~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 · 극락전 · 관음전 · 응진전 ~~~
· 조사전 · 퇴설당(堆雪堂) · 청화당(淸和堂) · 궁현당(窮玄堂) · 구광루(九光樓) · ~~~
경학원(經學院) · 선원 · 우화당 · 보경당 · 적묵당 · 선열당 · 사운당(四雲堂) · ~~~
독성각 · 해탈문 · 봉황문(鳳皇門) · 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명부전을 돌아 나와 ~~~
어수정을 보고는 ~~~
팔만대장경을 보러 떠난다.
0.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