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맛찾아 사람찾아/전적비, 기념비, 추모비

한천정사와 유허비

by 어우렁 2009. 11. 23.

 

 

한천정사와 유허비 

 

0. 위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천리 50번지 (문화재 자료 제28호 1999년 09월 15일 지정)

 

 

 

유허비 안내판과 비루모습

 

 

 

 

 

 

한천정사 안내판과 정사의 이모저모 모습

 

 

 

 

 

 

 

 

 

 

 

 

0. 우암 송시열 소개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때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에 밀고함으로써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윤휴(尹鑴)와 대립했다. 예송은 〈대명률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숭록대부에 특진되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한 데 이어 좌참찬에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짓는 등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학문경향과 정치사상
송시열은 젊은 시절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그는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는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통 성리학자로서 그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주자대전 朱子大全〉·〈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긴 것은 이같은 그의 학문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학풍은 기본적으로 양란 후의 사회적·정치적 동요를 수습해서 양반지배체제를 재건하고 나아가서는 조선과 명(明)의 '원수'인 청을 물리치고 중화적 세계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곧 주자학의 명분론인 삼강오륜을 사회운영의 원리로 파악하여, 청에 대한 복수의 근거를 명에 대한 강상(綱常)·군신(君臣)의 관계에서 찾았다. 이같은 북벌론은 당연히 조선왕조의 부국강병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송시열이 강조했던 것은 '세도정치론'(世道政治論)이었다. 이는 강상윤리를 기초로 하는 사회기강의 확립과 주자학적인 의리(義理)·도학(道學)의 실현에 목표를 두는 것이었으며, 또 이의 실현주체로서 성학(聖學)의 수양을 쌓은 성인(聖人)으로서의 군주를 상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현인(賢人) 재상(宰相)이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세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군자당(君子黨)은 노론뿐이라는 당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주자의 교의에서 벗어나 본래의 공맹(孔孟)에서 유학을 재정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방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허목(許穆)이나 윤휴 등 남인의 학자들과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던 것이다. 복상을 둘러싼 2차례의 예송에 깊이 간여하면서 남인과 대립했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송시열의 이같은 정치운영론은 일단 실패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론의 일당전제정치 확립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체계로서 정치와 학문 양 측면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지주제유지론과 부세제도개혁론
송시열은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명에 대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설치가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것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임과 동시에 양란 이후 국가재조(國家再造)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국가기강의 확립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이념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국가재조의 방향에 있어서 그는 봉건국가의 틀을 유지·강화하는 가운데 그 운영을 개선하여 양란 이후의 사회적 모순에 대처해나가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송시열은 이 시기 정전론(井田論)·기전론(箕田論)으로 집약되던 토지개혁론에 대해 반대했다. 곧 그는 주자의 정전제난행설(井田制難行說)에 따라 정전제는 토지가 적고 인구가 많은 시기에는 실현할 수 없으며 병란을 거치고 인구가 감소한 뒤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양란 후의 사회경제 재건을 위해 내놓은 대책은 부세제도(賦稅制度)와 재정제도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이었다. 즉 부세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문란해진 농민수취 질서를 재정비하여 농민부담을 경감시키는 한편 국가재정을 강화한다는 것이 그 주요내용이었다. 내수사(內需司) 혁파, 궁방전(宮房田) 억제, 군영(軍營) 감축, 호적법·호패법·향약·사창법·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대동법·호포법 등의 재정비·실시 등 송시열이 제기한 구체적 방책들은 농민의 각종 세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세를 부담하는 양민층을 확대하고 국가의 재용(財用)을 절감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통해 민산(民産)을 안정·발전시키는 것이 강력하게 요구되는 시점에서 송시열의 부분적인 제도개선책으로서는 점차 높아가는 사회불안과 체제동요를 막을 수 없었다. 송시열이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던 것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약 70여 개 소에 이르는 서원이 세워졌다. 1716년(숙종 42)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을 통해 그의 학문적·정치적 권위가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영조·정조 이후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지문 문제로 노론·소론으로 분당되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가 나왔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주자학적인 정치·경제·사회 사상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흐름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계녀서 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년(숙종 43) 교서관에서 간행된 〈우암집〉 167권과 1787년(정조 11) 평양감영에서 출간한 〈송자대전 宋子大全〉 215권이 있다. 그뒤 9대손 병선(秉璿)·병기(秉夔) 등이 〈송서습유 宋書拾遺〉 9권, 〈속습유 續拾遺〉 1권을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