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몽재
0.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 2길 8
훈몽재는 조선 명종 3년(1548) 하서 김인후가 처의 고향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 하고,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
김인후가 훈몽재에 머물렀던 시기는 1548년부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며 이후, 1680년경 김인후의 5대 손인 김시서가 ~~~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였다가 1820년경 김인후의 후손들이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정철, 이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훈몽재가 중건되었으나 ~~~
1951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표토층의 10~20㎝ 아래에서 훈몽재의 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
현재의 모습으로 복토작업이 이루어져고 지정대상지에 인접하여 훈몽재와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이 위치하고 있다.
김인후(金麟厚, 1510~ 1560)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그의 문학이
출중하여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한국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도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며,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이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 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 등이 있다.
제자로는 변성온·기효간·조희문·양자징·정철·오건 등이 있으며,
기대승·김천일·박순 등도 문인을 자처했다.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훈몽재에는 선비의 길 6km가 조성되어 있는데 훈몽재에서 출발하여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 생가를 거쳐서 낙덕정까지 이어지는 역사 문화 탐방길인데 ~~~
추령천을 따라 걷는 길로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훈몽재의 모습을 전체 담아 보면서 관람을 끝낸다.
0.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