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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찾아 사람찾아/전적비, 기념비, 추모비

몽금포작전 전승비와 해군 2함대 주둔기념비

by 어우렁 2024. 11. 30.

 

몽금포작전 전승비

 

몽금포 작전은 광복 이후 혼란한 시기 북한의 도발을 응징보복하기 위해 계획된

작전으로 해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하에 1949년 8월 17일 북한의 몽금포항에

함정 5척과 특공대 20명을 보내 북한 경비정 4척 격침, 1척 나포, 포로 5명 등 ~~~

전과를 올렸으나  당시 무쵸(John J. Muccio) 주한미국대사가 '남한 부대의 38선 월경

위반사건'으로 규정하며 한국정부에 항의함에 유공자에 대한 포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고 외교문서가 공개됨에 따라 6·25 전쟁이 북한에 의한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불식됐다고 해군은 설명했다.

이후 몽금포작전 참가자 7명 정부포상이 결정되어 몽금포작전 당시 JMS-302

정장이었던 공정식 6대 해병대사령관(당시 소령)은 무공훈장 중 최상위인 ~~~

태극무공훈장(1등급)을, 작전계획을 입안하고 특공대를 이끌었던 함명수

7대 해군참모총장(당시 소령)은 을지무공훈장(2등급)을, 김상길 예비역 소장

(당시 소령, JMS-301 정장)은 화랑무공훈장(4등급)을 받는다.

고 이태영 중령(당시 서해첩보부대장)과 고 이종철 준장(당시 PG-313 정장)에게는

충무무공훈장(3등급), 고 백운기 대령(JMS-307 정장)과 고 남철 소장(YMS-503 정장)

에게는 화랑무공훈장(4등급)이 추서 됐다.

당시 정호섭 해군참모총장은 축사를 통해 "적의 도발원점과 지원전력까지 타격한 ~~~

몽금포작전의 승리는 정부의 단호한 결심, 군의 치밀한 계획과 즉응태세 유지, ~~~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도 전우를 구하겠다는 선배전우들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

이뤄낸 쾌거"라고 이야기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좌측 편에 서서 남침에 빌미를 주어다고 떠드는 학자나 일부

정치인으로 인해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

1990년대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확실한 남침으로 확인되어 그나마 늦게라도

그 공을 인정받게 되어 참가하신 분들의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군 2함대 주둔기념비

1945년 4월 15일 이곳에서 발족한 해군기지는 한국전쟁 때 군산을 거쳐 ~~~

목포에 있다가 1953년 7월 정전과 더불어 이곳에서 인천 경비부로 조직하여 운영하다 

73년 7월 제5 해역사 사령부로 그리고 1986년 2월 해군 제2 함대 사령부로 증강 ~~~

개편되었다가 1999년 11월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해군의 역사가 살아 있는 이곳에

해군 주둔지 기념 조형물을 남기게 되었다.

주변에는 산책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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