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0. 유격 백마부대에 관한 안내.
1950년 6•25 전쟁은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이요, 16개 유엔 회원 국군이 참전한 국제전쟁이요, 그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여 가히 세계 전사상 손꼽힐 처절한 싸움이었다. 3년여 만에 휴전으로 일단락 지어진 이 전쟁은 한•미 양국 정규군에 의하여 이끌려졌으나, 우리 민족 수난의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 전쟁에도 의병들의 피와 땀, 애국지성으로 뒷받침한 비 정규군에 힘입은 바는 실로 컸다. 1950년 12월 22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북 정주군 갈산면 번저리에서 조직된 “유격백마부대”는 전쟁 중에 활약한 20여개 유격부대 중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으니, 그 병력이 2천 6백 여명으로 가장 큰 부대였으며, 서해안 일대의 애도, 천산반도, 월사리, 대화도, 신미도, 압록강 입구, 청천강 입구 등 그 활동 무대가 가장 넓었으며, 교전 횟수가 5백여 회요, 적 3천 여명 사살, 중공군 6백여 명 생포, 철도, 터널, 교량 및 중요시설을 무수히 파괴한 외에 반공 애국 청년 2천 8백 여명과 민간인 1만 5천 여명을 구출하는 등 그 전과 면에서도 단연코 첫손에 꼽혔으니, 그 애국충정과 백절불굴의 투지는 타 유격부대는 물론 어느 정규부대보다 위에 있었음이라, 평안북도 일대의 치안대원과 오산학교 학생 등 나이 어린 청소년들이 모여 군번도 계급도, 무기도 제대로 된 지원 없이 부대장 김응수를 핵심으로 오직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북위 40도 선을 넘나들며 싸우기를 3년, 이름없는 섬과 험한 산골에서 적탄에 쓰러진 전몰자가 552위에 이르렀다. 첫 추도식이 1952년 백령도였고 그 후 이곳 저곳 전전하며 위령의 제단을 쌓기 50년, 월남한 평북출신 유지들의 정성과 후원에 힘입어 여기 서울 시민의 숲에 님들을 기리며 탑비를 세우노니 님들이여 고히 잠드소서! 통일 조국을 지켜보소서!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 Memorial Monument to Baekma Guerrilla Corps 안내표지 전문] 1950년 10월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던 UN연합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철수하자 평안북도 정주군과 박천군 일대에서 치안 활동을 하던 청년들과 오산학교 학생들이 그 해 11월 22일 정주군 갈산면 번저리에서 유격백마부대를 조직하였다. 김응수를 부대장으로 한 대원 2,600여명은 군번도 계급도 없고 무기 등 변변한 지원이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애도, 철산반도, 월사리, 대화도, 신미도, 압록강, 청천강 하구 등에서 공산군과 500여회의 교전으로 적 사살 3,000명, 중공군 생포 600여명, 반공애국청년과 민간인 구출 18,000여명과 철도, 터널, 교량, 기타 주요시설 파괴 등 북위 40도선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어 UN연합군의 정규작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기간 중 552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던 바, 생존 대원들은 1952년 백령도에서 추도식을 올린것을 시작으로 각 처를 전전하며 추도 행사를 하다가 1992년 평안북도 유지들의 뜻과 성금을 모으고 노태우 前 대통령이 탑명을 휘호하여 양재시민의 숲에 충혼탑을 세워 젊은 반공의병들의 공과 넋을 기리게 되었다. 1950년 10월 당시 유엔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음에도 북한군에 중공군이 가세해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평안북도 일대의 치안대원과 오산학교 학생들은 11월 22일 김응수 부대장을 중심으로 비정규 전투부대를 창설하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구성된 향토군임에도 불구하고 2,600여 명의 스무살 안팎의 건강한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유격백마부대라고 이름을 명명하고 조직화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전투에 적합한 군수 물자를 보급받지 못했고, 체계적인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해 중공군을 상대로 어려운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국을 위한 애국심으로 단결해 혁혁한 성과를 세웠습니다. 유격백마부대는 서해안 압록강, 청천강 입구 등에서 500여 회의 교전을 통해 중공군 3,000여 명을 사살했고 600여 명을 생포했습니다. 또한 민간인 1,500여 명을 구출하는 등 빛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북한의 다리와 터널, 철도 등을 전략적으로 무력화하는 등 자신들의 기반 지역을 벗어나 넓은 범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등 정규군 못지 않은 위용을 보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552명의 청년들이 장렬히 싸우다 눈을 감았습니다. 이들은 세운 공을 치적받지도 못하고 채 피우지 못한 꽃 봉우리를 접은 채 나라를 위한 애국심만 가슴에 품고 산화했습니다. 이들을 위해 1952년 백령도에서 첫 추모식이 열렸고 이후 각 지역에서 추모식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1992년 유격백마부대 기념사업회에서 양재 시민의 숲 공원에 충혼탑을 세우게 됐습니다. (퍼온글)
충혼탑 앞에 있는 유엔기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의 모습
충혼탑과 백마부대에 관한 설명 안내판
충혼탑에 관한 이야기
유격 백마부대에 관한 이야기
유격 백마부대 전사자와 생존자 명단
0.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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