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가섭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365년(공민왕 14)에서 1376년(우왕 2) 사이에 나옹(懶翁)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벽암(碧巖)이 중건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응진암(應眞庵)이라 불렀다.
1938년에 불탄 뒤에는 주지 윤원근(尹元根)이 중건하였다.
1985년 미륵석불을 조성하였고, 1986년 대웅전이 무너져 위치를 옮겨 지금의 자리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었다.
1990년 삼성각을 개축하였고, 요사를 옛 대웅전 자리에 지었으며, 1988년 일주문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의 극락보전과 3칸의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높이 90㎝의 아미타여래좌상은
음성읍 용산리상봉악사(上鳳岳寺)가 폐사되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과,
음성군 감우리성주사(聖住寺)가 폐사된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가섭사에서 내려다 본 음성 시내 모습인데 미세 먼지로 앞이 잘 안 보인다.
아미타여래삼존불의 재료는 나무라는 설과 싸리나무로 엮어서 만든 부처라는 설이 있지만,
현재 개금 되어 있어 확인할 수가 없다.
이 밖에도 6폭의 탱화와 1930년에 주조한 종, 조선시대에 만든 길이 150㎝의 석조(石槽) 등이 있다.
이 절에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감로정(甘露井)이 있는데 이 우물은 국가에 변혁이나
난리가 있을 때 수량이 감하거나 고갈된다고 한다.
광복 1개월 전에 우물이 고갈되었고, 6·25 직전에도 물의 양이 감소되었으며
옛날에도 그러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약수는 없었다. 미신의 일부라고 믿고 싶다.
가섭이란 석가모니의 십 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욕심이 적고 족한 줄을 알아 ~~~
항상 엄격한 계율로 두타(頭陀)를 행하였으며, 교단의 우두머리로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극락보존은 문이 닫혀 있어 감히 문을 열어 볼 용기가 없어 아미타여래 삼존불을 알현하지 못했다.
가섭사 주변에 여러 명판이 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가섭사를 다시 중건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바위틈에서 난다는 감로수는 찾지 못했고 석조로 만들어 놓은 약수 받는 그릇이 있는데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극락 대전의 처마 밑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비스듬히 있는 것이 의도적으로 한 것 같다.
종각은 단청이 없는 대신 현판이 달려 있는데
일주문은 단청을 하였지만 현판을 달지 않았다.
0.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