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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우리나라 100대 명산

설악산 이야기 2일차

by 어우렁 2009. 11. 3.

 

우리나라 100대 명산 10-2

설악산(백담사 코스) 2일차

 

설악산 중청대피소에서 아침에 본 설악의 모습

 

중청대피소를 떠나면서 기념사진 찍고~~~

 

이제 다시 소청봉을 지나 봉정암으로~~~

 

중청대피소와 대청봉 사이를 하얀 구름띠가 지나가고 있다.

 

아름다운 설악아!!!  우리 이제는 하산한다.

 

소청봉에서 봉정암으로 내려가면서 보이는 괴석과 풍경들~~~

 

 

 

봉정암에서 사리탑으로 가는길에 산신각과 괴암 절벽

 

 

비바람으로 글씨가 지워져 무엇이라고 써는지 해독이 안되는 오래된 글씨(설명판이 없음)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들어 있는 석가탑을 가까이에서 찍고 먼곳에서 내려보고 찍은 모습

어느 보살의 불공드리는 모습이 간절해 보인다.

 

 

0. 봉정암과 석가탑에 대해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대표적 불교성지인 오대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서 유명하다. 대청봉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데, 해발고도 1,244m 지점에 있어 백담사와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기 위한 산행은 매우 힘겹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봉정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다.
현존하는 전당은 법당과 요사뿐이다.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석가사리탑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사찰의 여느 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고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이 자연암석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엽씩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가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맨 위에는 연꽃인 듯한 원뿔형 보주가 높이 솟아 있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 원효·보조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17) 원효가, 1188년(고려 명종 18)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화재로 자칫하면 명맥이 끊어질 뻔하였다.

0. 오대적멸보궁이란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석가모니불이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 항상 적멸의 낙을 누리는 곳이다.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예불을 올릴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설치해 둔다. 부처의 존상이나 후불탱화도 없고 다만 법당 바깥에 사리를 모신 탑이나 계단()을 설치한다. 

한국의 오대적멸보궁은 ①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중대() 상원사()의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말한다. 

이들 적멸보궁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590∼658)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정골()이 모셔져 있다. 다만 정암사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는 임진왜란 때 유정(:사명대사)이 왜적의 노략질을 우려하여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모신 것이다.

통도사에는 자장이 반야()의 지혜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 근본인 계를 금강석처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금강계단()을 쌓고 석가모니의 가사와 진신사리를 모셨다. 상원사에는 자장이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거주지로 보고 사리를 모신 뒤 적멸보궁을 쌓았는데, 뒤에 신라 신문왕의 두 왕자인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인 중대지로산()에 절을 지었다. 지금은 불사리를 안치한 장소를 알 수 없고, 뒤쪽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 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설악산 봉정암 역시 자장이 창건하고 5층석탑에 불사리를 안치한 곳이다. 태백산 정암사도 자장이 문수보살의 모습을 보기 위해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보궁 건물 뒤쪽 산 위에 수마노탑이 있다. 사자산 법흥사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다는 토굴, 자장이 경전을 담아온 석함 등이 있다.(두산백과사전인용)

 

곰바위와 공릉능선 모습과 기념사진(좌측부터 바람계곡,한놈,어우렁)

 

 

 

이제 오세암을 향하여 내려가자~~~

 

오세암으로 내려가면서 어느 위치였는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설악의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에~~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다람쥐들과 장난을 즐기고~~~

 

 

 

잠깐 쉬워으니 또 가자!!!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고~~~

 

산등성이를 헉헉거리면서 또 오르고~~~

 

설악의 숲에는 이런 나무가 많이 널려 있어 자연의 생노병사를 보는것 같습니다..

 

 

 

오세암 뒤에 있는 이정표

 

0. 아!!! 드디어 오세암이다. 어제의 피로가 겹쳐 정말 힘들게 왔다.

오세암의 여러 모습들~~~

 

 

 

 

 

동자전에서 독경하시는 스님은 여승이였습니다.

0. 오세암에 대하여

   대한불교 조계정 제3교구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백담사에서 10㎞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영시암을 지나 마등령으로 가는 길에 있다. 647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590~658)이 이 곳에 선실()을 지은 뒤, 관세음보살이 언제나 함께 있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관음암()이라고 하였다. 1445년(조선 세조 1)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이 곳에서 출가하였고, 1548년(명종 3) 보우()가 이 곳에서 기도하다가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었다. 1643년(인조 21) 설정()이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름을 바꾼 데 따른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정이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에서 키웠는데, 어느 날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혼자 양양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 동안 혼자 있을 4세된 어린 조카를 위하여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조카에게 밥을 먹고 난 뒤 법당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줄 거라고 일러주고 암자를 떠났다. 그러나 설정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이듬해 눈이 녹을 때까지 암자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눈이 녹자마자 암자로 달려간 설정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조카를 보게 되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는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그때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관음봉에서 내려와 조카의 머리를 만지며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 이에 감동한 설정은 어린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암자를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2003년 5월 오세암이란 애니메니션 영화로 소개되어 많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게도 했다.
1856년(고종 2) 남호가 해인사의 《고려 대장경》 2질을 인출하여 1부는 오대산 상원사에, 1부는 이 곳에 봉안하였다. 1888년(고종 25)에는 백하가 2층 법당을 짓고 응진전을 건립하여 16나한상과 각종 탱화를 조성, 봉안하는 등 크게 중건하였다. 그뒤 6·25 전쟁 때 일부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수선 도량과 관음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법당 뒤로는 관음봉·동자봉이, 오른쪽으로는 공룡릉이 올려다보이며, 인근에 내설악의 꽃으로 일컬어지는 만경대가 있다. 주변에 백담사·용대자연휴양림·십이선녀탕계곡·옥녀탕계곡·장수대·대승폭포 등 관광지가 많다. (두산백과사전 인용)

 

 

또 길을 떠나고~~~

 

계곡사이를 지나서~~~

 

살아 1000년, 죽어 1000년이라는 구멍 뚥린 주목나무(나무 위로는 숲이 무성함)을 지나~~~

 

오세암에서 출발해서 2.5km을 왔다. 좀 쉬어가자.

앉아있는 바람계곡과 한놈의 모습이 무척이나 피로해 보인다. 

 

백담사까지 3.9km가 남았으니 또 가자. 잘 다듬어진 숲길을 따라~~

 

계곡물 흐르는 소리에 피로을 달래보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다보니~~~

 

백담사가 1.5km밖에 안 남았네~~~ 이제 마지막 힘을 다하여 가지.

 

0. 드디어 백담사에 도착!!!

백담사 입구의 돌다리 모습("수심교"라고 한다)

 

백담사 입구 돌다리를 지나면 바로 금강문이 나오고 그뒤에 백담사 문이 나온다.

 

 

"백담다원" 방문객들이 차를 마실수 있는 곳이다.

 

백담사 뜰에 있는 시인들의 시비들~~~

 

 

 

 

 

 

 

만해 한용운님의 시비와 흉상

 

만해 교육관

 

만해 기념관

 

만해당 모습

 

 

백담사 뒤뜰에 있는 미륵 탑

 

화엄실 전경

0.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거 하던 곳으로 앞에 사진은 당시 기거 모습을 담은것이다.

 

 

극락전과 삼층석탑 그리고 범종각

 

 

 

한놈이 극락전에서 불공드리고 시주하면서 나오고 있다.

0. 백담사에 관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 690년(신문왕 10년)에 불타버려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 이때의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가 있었는데 주위의 산에 짐승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산수가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라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노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며,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려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전으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 6번재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두산백과사전 인용)

 

0. 이제 모든 일정 끝마치고 집으로 가자.

  

0. 백담사에서 용대리 주차장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용대리에서 주차한 승용차를 타고 나오니

   주차 요금이 하루에 4000원씩 이틀 8000원을 지불하고 안양으로 출발하였다.

 

안양가는길에 식사를 하기로 하고 44번 국도 옆 식당에 차를 세우고~~~

 

바람계곡이 설악산 백담사에 오면 꼭 들린다는 식당


 

막국수가 일품이라고 하여 막국수 한그릇씩 시켜 먹고~~~ 맛은???

 

0. 안양에 도착한시간이 18시 정도되어 차량을 바람계곡 집에 두고 안양시내로 나와 뒷풀이

    로 막회와 문어회로 저녁 겸 술 한잔씩하였는데 3명이 소주 5병이라~~~

    좀 많이 먹지 않았나???

0. 설악산 산행은 전에부터 한번 가고 싶은곳이였는데 바람계곡 덕분에 좋은 구경하였고 많

   은 추억을 만들어서 즐거운 산행이였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코스로 또다시 설악산을 오르고 싶다.

 

여러분 설악산 감상 많이 하셨습니까.

부족한 점이 있었도 많은 이해 부탁드리면서 다음에 또~~~ 안녕히

 

0. 2009년 11월 3일 "카페 장노시방"에서 옮겨와 간단히 재편집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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